5일 저녁, 와이드 앵글 다큐멘터리 경쟁 부문 출품작인 <농민가>(윤덕현)가 상영된 해운대 메가박스 3관에서는 다른 영화제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풍경이 펼쳐졌다. 모든 자리가 꽉 차진 않았지만 경상도 사투리가 쉼 없이 극장을 매우며 유난히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그 주인공들은 <농민가>에 출연한 경남 사천의 농민들로, 월드 프리미어 상영을 축하하기 위해 전세버스를 타고 부산을 찾았다.
그들은 곧 눈앞에 펼쳐질 자신들의 모습을 기대하며 상기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기술상의 문제로 상영이 5분가량 늦어졌지만 불평하는 이는 없었다. 자원봉사자가 “상영이 늦어져 죄송합니다”라고 사과방송을 하자, “그럼 노래 한 곡 하이소”라고 말하며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큰 웃음을 선사했다.
<농민가>는 윤덕현 감독이 경남 사천에서 2년가량 머물며, 농민들의 일상과 그들이 펼치는 한미FTA 투쟁기를 담은 작품이다. 농민들은 자연이 정해준 일정에 따라 씨를 뿌리고, 결실을 맺을 때까지 땀을 흘리기도 바쁘다. 하지만 그들 앞에는 한국의 농업에 심대한 타격을 줄 한미FTA가 비준을 앞두고 있기에 농민들은 바쁜 농번기에도 서울과 사천을 오고가며 힘겨운 투쟁을 한다. 윤덕현 감독은 이러한 농민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카메라에 담음으로써 ‘왜 농민들이 삶의 터전이 아닌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서 투쟁을 펼치나’를 보여준다.
이 작품을 기존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 작품들과 비교해 깊이 있는 시선을 보여준다거나 관객을 울리는 드라마틱한 구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라고 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농민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더없이 따듯하며, ‘타자화 된 농민’이 아닌 살아 숨 쉬는 이들로 생생하게 묘사한다. 윤덕현 감독은 편집 과정에서 농민들의 과잉된 감정은 철저히 배제하면서 관객들에게 감동을 강요하지 않는다. 농민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카메라는 동시대의 농민들이 어떤 고민을 하고,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충실히 전달한다.
한미FTA 반대 집회에 참가하기 위해 상경하는 농민들의 모습을 담은 장면이 그 대표적인 예다. 사천 농민회는 농민을 모으고, 먹을 것을 마련하며 며칠 동안 상경을 위한 준비를 한다. 하지만 상경 당일, 농민들이 빌린 버스는 마을을 떠나지 못한다. 사천경찰서에서 배치한 경찰들이 그 길을 막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살고 있는 나라에서 자기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는 것이 그들의 현실이다. 이에 항의하기 위해 농민들은 사천 인터체인지를 막는다. 이 때 한 경찰이 “국민들 다니는 걸 방해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경찰의 방해로 이동의 권리를 박탈당한 농민들은 이미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다.
이 밖에도 작품은 한미FTA를 넘어 농민과 농촌이 처한 다양한 현실을 보여준다. 젊은 사람들이 대부분 떠난 농촌에서 젊은이들을 붙잡기 위해 공장을 세워야 하는가, 아니면 환경과 ‘누구나 일을 하고, 살 수 있는 농촌’ 본래의 의미를 지키기 위해 땅과 갯벌을 지켜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은 쉽게 답이 나오지 않는다. 또 농사를 지으면 지을수록 빚이 늘어나고, 살기 위해 농업을 포기하는 것이 더욱 합리적일 수밖에 없는 그들의 현실은 그 어떤 장밋빛 미래도 예고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민들은 생명력을 잃지 않는다. 힘든 상황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서로를 독려하며 자신들이 갈 길을 걷고 있다. 힘이 들 때는 소주 한 잔에 노래 한 곡으로 지친 심신을 위로한다. 이것이 <농민가>의 가장 큰 장점이자 미덕이다. 자연 속에서 생명을 가꾸는 이들이 자신들의 그것을 잃어버린다면 그들에게 미래는 없다. 하지만 농민들은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 생명에 대한 자각을 잃지 않는다. 이것이 사계절 차가운 현실 속에서도 봄의 도래를 꿈꾸게 만드는 유일한 희망이다.
상영이 끝나고 관객과의 대화에 윤덕현 감독과 최왕의 사천시 농민회 회장이 스크린 앞으로 나왔다. 최왕의 회장은 “고등학교 졸업하고 35년 만에 영화를 보는 거라 어떤 게 좋은 건지는 잘 모르겠으나, 우리 농민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를 보니 기분이 좋다”라고 소감을 전했다. 윤덕현 감독은 “여러 가지 부족한 점이 많은 작품인데 먼 곳에서 찾아주셔서 감사하며, 포기할 때도 있었는데 끝까지 힘을 주신 농민들 덕분에 작품을 완성할 수 있었다”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여기에 “잊고 있었던 것들을 떠올리게 해준 감독과 농민들에게 감사하다”는 관객들의 감상평이 이어지면서 ‘훈훈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농민-영화-관객이 하나 되어 만드는 또 다른 ‘농민가’는 그렇게 마무리 됐다. 부산영화제에서 찾은 ‘참 귀한 사람들’이다. 안효원 기자(FILMON)
'REVIEW ON' 카테고리의 다른 글
| ['08 PIFF] <시선 1318> - ver.1318 다섯 개의 시선 (0) | 2008/10/09 |
|---|---|
| ['08 PIFF] <시집> - 운명 따윈 필요 없어 (0) | 2008/10/08 |
| ['08 PIFF] <농민가> - “소주 한 잔 하고, 힘내라!” (2) | 2008/10/07 |
| <트럭> - 소재가 다가 아니다 (1) | 2008/09/26 |
| <헬보이 2> - 못난이가 아닌 로맨틱 가이라 불러다오 (0) | 2008/09/25 |
| <멋진 하루> - 떼인 돈 받아 드립니다 (2) | 2008/09/24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