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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PIFF] <시집> - 운명 따윈 필요 없어

REVIEW ON 2008/10/08 13:24 Posted by 정미래


송혜교의 미국 진출작으로 화제를 모았으며, ‘페티쉬’(Fetish)라는 제목으로 알려졌던 독립영화 <시집>(Make Yourself at Home)이 13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갈라 프레젠테이션(월드ㆍ인터내셔널 프리미어 작품 또는 거장들의 신작ㆍ화제작을 소개하는 부문)으로 공개됐다.

무당의 딸이며 역시 무당의 운명을 타고 난 숙희(송혜교)는 신내림을 거부하고 한국계 미국인 피터(롭 양)와 중매결혼을 해 도망치듯 미국으로 간다. 그러나 낯선 이국땅에서 숙희를 맞이하는 건 어색한 남편과 까칠한 시어머니(준 교토 루), 그리고 생전 처음 보는 외국인인 이웃집의 존(아르노 프리스치), 줄리(애쉬나 커리) 부부다. 숙희는 독실한 기독교인 시어머니를 따라 교회를 나가고, 존 부부와 친하게 지내며 미국에서의 새 삶을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피터가 갑작스레 사망하면서 파국이 시작된다. 엄마가 몰래 싸 보낸 무당 방울이 숙희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뉴욕에서 활동하고 있는 손수범 감독의 장편 데뷔작 <시집>은 ‘무당’이라는 한국적 소재를 이용한 스릴러 영화다. 무당의 운명을 거부하고 미국으로 떠난 숙희는 자신이 살고 싶은 인생을 개척하려는 여성의 욕망이 극단적으로 표출된 캐릭터다. 머나먼 이국땅으로 시집가 아무렇지 않게 결혼 생활을 하지만, 무당의 주변 사람은 죽어 나간다는 속설이 사실로 증명되면서 숙희는 운명의 덫에 갇히고 만다. 그러나 그녀는 이에 굴복하지 않고, 악녀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으며 운명을 피해간다.


<시집>에서 눈여겨 볼 것은 동서양의 문화적 충돌이 만들어 내는 기이한 분위기다. 20여 년간 무속인의 자식으로 살아왔던 한국인 숙희, 처음 보는 사람에게 거리낌 없이 말을 걸고 애정 표현을 서슴지 않는 미국인들, 그리고 미국인도 한국인도 아닌 제3의 정체성으로 살아가는 한국계 미국인들이 표출하는 미묘한 적대감이 팽팽한 긴장감을 형성한다. 특히 한국인의 모습으로 미국에 살면서 교회를 중심으로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는 한국계 미국인들의 독특한 문화가 인상적으로 묘사된다.

무당이라는 소재가 어떻게 여성의 욕망을 드러낸 심리 스릴러로 이용될 수 있을까? <시집>이 선택한 방법은 매우 색다르다. 아담한 체격과 검은머리의 전형적인 동양 여성인 숙희는 늘씬한 금발 미녀인 줄리를 따라하며 무당의 그늘에서 벗어나려 한다. 처음엔 영어 이름을 줄리로 짓고, 줄리의 헤어스타일과 화장을 따라 하더니 급기야 자신이 곧 줄리가 되길 원한다. 결국 숙희는 동양인의 정신뿐만 아니라 외모마저 버림으로써 다르게 살고 싶은 욕망을 실현하게 된다. 숙희와 줄리의 외모가 뒤바뀐다는 모호한 결말이 긴 여운을 남기는 영화다. 정미래 기자(FIL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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