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행 대박이 영화의 가치를 판단하는 절대적 기준은 아니지만, 좋은 영화가 좀 더 많은 관객에게 사랑받는다면 그 가치는 더욱 빛나게 되는 법. 뛰어난 작품성에 재미까지 갖춘 훌륭한 영화가 흥행까지 되어 대박을 치면 그만큼 기쁜 일이 또 어디 있을까. 그런데 하품 나는 예술영화도, 한숨 나는 쓰레기도 아닌 대중성 충만한 좋은 영환데 저렴하게 주목받고 극장에서 찬밥신세가 되거나, ‘듣보잡’으로 취급되어 조용히 사라져 간 경우가 있다. 개인적으로 올해 최고의 영화라며 추켜세우고 싶지만 대중의 소박한 관심 때문에 목소리를 낮추게 만드는 그런 영화들. 상영 내내 사랑 받다가 연말이면 결산특집으로 또 다시 주목 받는 흥행작들의 그림자에 가려 추운 연말을 맞아야만 하는 비련의 영화들. 이상하게 대박 못 쳐 관객 입장에서 못내 억울한 수작들! FILMON 기자들이 지극히 주관적인 기준으로 선정한 2008년의 억울한 베스트 영화 10편을 소개한다.
<갓파 쿠와 여름방학을>
2008년 6월, 단순한 이야기와 그림을 가진 <갓파 쿠와 여름방학을>이 극장 개봉했다. 표면적으로는 초등학생 방학맞이용 쯤으로 비춰졌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아뿔사, 이거 잘못 짚었다. 현재 각종 IPTV 및 부가서비스 시장에서 상영되면서 멀쩡한 어른 관객들을 펑펑 울리고 있다. 이 영화에는 스튜디오 지브리의 캐릭터들처럼 앙증맞아 소스라칠 그림도, 현란한 CG, 엄청난 우주관도 없다. 오히려 주인공 '쿠'는 오리 주둥이에 개구리 몸통, 거기다 대걸레 자루를 뒤집어 쓴 듯 비호감의 외모를 지녔다. 그러나 영화가 시작되는 순간 이미지화된 상상 속의 동물이 펄펄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로 변신한다. 맥주 한 모금에 취해 전통 노래를 흥얼거리거나, 씨름과 수영을 하면서 생기를 얻는 등의 귀여운 에피소드가 재미있는 것은 물론이고 등장인물 하나하나마다 눈높이를 맞춘 예민한 관찰의 시선이 느껴진다. 급기야 자연 그대로인 갓파를 거대 문명도시에 적응시키려는 과정이 그려지면서 (인간)관객들을 엄청난 죄책감의 눈물바다로 몰고 간다. 송순진 기자(FILMON)
여성영화 혹은 아줌마 영화 정도의 오해를 사며 세간에 공개됐던 <걸스카우트>는 사실 평범한 생활인들을 돈가방 쟁탈전이라는 장르영화에 몰아넣는 이색적인 시도가 더욱 돋보이는 영화다. 희망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하찮은 인생 단번에 뒤집어엎을 ‘한탕’ 그 자체에 매진하는 것이 아니라 고작 피곤하기 짝이 없는 일상으로의 복귀가 목표인 이 씁쓸한 스릴러는 여성의 영역, 아줌마들의 성역, 그리고 루저들의 영지까지 두루 훑으며 돈가방 두고 엎치락뒤치락하는 기존 장르영화에 무규칙 이종기술을 먹인다. 생활인의 굴레에 얽매인 봉천3동 4인방의 장점을 끝끝내 수호하며, 결코 스타일리시할 수 없을 루저들의 처절한 분투기를 스타일리시하게 꾸며내 코믹하고도 시큰한 정착지까지 안내하는 방식은 충분히 칭찬할 만하다. 또 익을 대로 익은 배우들의 연기와 이를 조율하며 루저들의 세계를 장르영화의 세계로 이끌어내는 신인 김상만 감독의 연출은 더욱 주목할 만하고 말이다. 강상준 기자(FILMON)
<경축! 우리 사랑>
청춘 남녀가 아닌, 늙었거나 추레한 인간군상들의 사랑을 다룬 영화들은 대개 퍽퍽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소처럼 늙은 한 아주머니를 주인공으로 한 <경축! 우리 사랑> 속 사랑은, 정말이지 경축할 일로 그려진다. 영화는 중년의 여인이 딸아이의 약혼자와 사랑에 빠져, 마침내 아이까지 임신하고 만다는 파격적 스토리 라인의 도덕성은 잠시 논외로 하자고 말한다. <숏버스>의 대사처럼 전쟁보단 사랑이 낫지 않은가. 그래, 어찌됐건 사랑을 하는 것 자체로는 경축할 일이로다. 수많은 단편을 거쳐 늦깍이로 장편 데뷔한 오점균 감독은 경쾌한 논법으로 불륜을 돌파하면서도 진중함을 잃지 않는다. 김해숙, 주기봉 등 조주연 배우들의 코믹과 진지를 넘나드는 연기도 일품. 적정한 무게감으로 관객의 마음을 움찔하게 만드는 이 영화가 흥행하지 못한 것은 정말 아쉽다. 송순진 기자(FILMON)
<고고70>
음악영화는 음악이 좋아야 한다. 록음악 영화라면 라이브 공연 신이 죽여줘야 하지 않겠나. 이 ‘영화는 영화다’스러운 사실이 새삼 뼈 속까지 와 닿은 건 <고고70>을 만난 순간부터다. 그동안 ‘음악영화’라는 명목으로 출몰했던 몇몇 영화들이 음악 이상의 의미를 담으려는 지나친 의지로 말미암아 뭔가 이상하고 무겁기도한 엉성한 형태를 취한 걸 떠올려 봤을 때, <고고70>은 머리가 맑아질 정도로 명쾌한 해답을 던져줬다. 군사정권, 베트남 징병, 통금, 검열, 금지곡. 단어만으로도 우울함이 밀려오는 시대를 배경으로 삼았지만, 조명하거나 의의를 찾거나 비난하는 등의 폼을 잡지 않았다. 쓸데없이 감상에 젖지도 고뇌하지도 않고, 대단한 예술성을 따지지도 않으며, 어쭙잖은 로맨스도 뺀 채 오로지 로큰롤 하나에만 집중한다. 공들인 음악과 생생한 공연을 통해 록이 그냥 좋은 아이들의 명랑하고 치기어린 열정을 ‘즐기라’고 한다. 영화관에서 이처럼 신나는 경험을 하기도 드물다. 혼자만 보기 아까운 이 영화가 흥행까지 ‘고고’하지 못한 게 그저 안타까울 뿐이고. 정미래 기자(FILMON)
<렛 미 인>
불로불사의 몸으로 인간의 피를 갈망하는 뱀파이어는 더 이상 호러 세계에 군림하는 공포의 제왕이 아니다. 뱀파이어로부터 눈처럼 하얀 피부, 신비한 능력, 햇빛을 피해 어둠 속에 웅크린 어느 이방인의 모습을 건져 올리는 <렛 미 인>은 ‘뱀파이어’ 장르의 음습함에 쓸쓸하고 서정적인 기운을 더한다. 공포영화의 외피를 두르고도 그 속에 왕따 소년의 성장과 사랑에 힘을 기울이며 하얀 눈과 붉은 피 같은 명징한 시각적 이미지에 의존하는 영화는 인간의 허락을 받아야 방 안에 들어설 수 있다는 뱀파이어의 새 규칙을 통해 인간의 ‘관계맺음’ 그 기저에 집중한다. 그래서 두 소년소녀가 벽을 긁고 두드리며 모스 부호로 교감하는 장면은 하얀 설원과 건조한 도시마저 빛낼 만큼 아름답고도 슬픈 피내음으로 가득하다. 피를 갈구하는 뱀파이어 소녀 엘로이의 살육장면이 “빛이 사라지면 너에게 갈게”라는 소녀의 약속된 메시지만큼이나 조용하지만 강렬하고 또 아름다운 이유야말로 이 영화의 확고한 성취를 대변한다. 강상준 기자(FILMON)
<미쓰 홍당무>
영어학원 다니는 중학교 영어교사이자, 안면홍조증을 앓는 왕따, 재재재작년 회식 자리를 마치고 택시를 타고 가던 도중 귓가에 닿은 숨결에 아뿔싸 이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했다는 지상최강의 ‘자뻑녀’ 양미숙(공효진)은 분명 올 한해 가장 사랑받은 루저다. 퍽퍽한 삶을 딛고 일어서 희망을 좇는 왕도를 외면하고 짝사랑하는 남자의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제자이자 남자의 딸인 종희(서우)와 공조해 이간질에 열을 올리는 미숙은 마지막까지 무대 위에서 쓰레기 세례를 받으며 결국 누구의 사랑도 얻지 못한다. 허나 “내가 내가 아니었으면 나한테 안 그랬을 거면서”라고 얼굴을 구기는 그녀는 정말로 열심히 살았고 그 덕분에 기묘한 감동과 색다른 웃음을 선사할 수 있었다. 쓸어안아줄 공간조차 마련되지 않은 냉엄한 현실 속에 이들을 던져두고도 어학실에서 벌이는 촌극 장면 등으로 하여금 기념비적인 웃음을 선사하는 이경미 감독은 박찬욱의 후광과는 상관없이 분명 ‘자체발광’했다. 강상준 기자(FILMON)
<와인 미라클>
‘신세계와 구세계의 중간적인 맛’ 운운하며 허세부리는 게 와인의 미덕은 아니다. 근사한 레스토랑이 아니라도, 탐스러운 잔에 따르지 않아도 훌륭한 와인은 충분히 오감을 만족시킨다. 70년대까지만 해도 와인은 정통적이고 아카데믹한 프랑스의 자존심이었다. 그런데 히피들로 들끓던 미국 캘리포니아에도 와인이 있었다. 지저분하게 기른 머리에 때 묻은 청바지를 입고 물컵에 와인을 따라 마시는 소박한 이들이지만, 강렬한 태양에 한껏 그을리며 미국 땅에서 자란 포도와 자신만의 제조법으로 차별화 된 와인을 만들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한 영국인 와인 전문가가 실험적으로 마련한 ‘프랑스 와인 대 캘리포니아 와인’ 블라인드 시음회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와인을 만들던 이에게 기적을 안겨준다. 캘리포니아 와인의 극적인 탄생 실화를 가공한 <와인 미라클>은 와인 제조 지식과 와인에 대한 애정이 가득하고 해학과 감동이 넘치는 정말 ‘재미있는’ 드라마다. 제발 자신은 와인 애호가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이 영화를 거부하지는 말아 주길. <와인 미라클>엔 작은 영화가 줄 수 있는 최고의 재미가 담겼다. 정미래 기자(FILMON)
<주노>
열 일곱 살 소녀가 덜컥 아기를 가졌다. 이게 며칠 전에 새로 시작한 드라마인지 작년에 하던 드라마 재방송인지 도대체 구별하기 힘든 우리네 안방극장의 일일드라마였다면 일단 소녀의 어머니가 거품을 물고 쓰러지면서 한바탕 난리가 났을 거다. KBS의 <다큐미니시리즈 인간극장> 같은 휴먼 다큐멘터리였다면 주변의 따가운 눈초리를 헤쳐 나가는 소녀의 일상이 애처로운 시선으로 그려졌을 것이다. 하지만 <주노>는 달랐다. 영화는 더 없이 발랄했고, 예정에 없던 임신을 한 어린 임신부 주노는 누구보다 당당하고 씩씩했다. 주노는 이미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기 위해 허둥대지 않았다. 대신에 가족, 친구들과 힘을 합쳐 이미 벌어진 일, 어떻게 하면 현명하게 수습할 것인가 고민하고 나섰다. 임신을 했다고 해서 주노가 당장 ‘아줌마’가 될 필요도 없었다. 배부른 주노는 여전히 사랑의 미묘한 흥분과 아픔을 겪으며 성장했다. 번지르르한 외제차를 타고 명품을 휘두른 가짜 ‘쿨’함이 넘쳐나는 요즘, <주노>는 우리 시대 진정으로 필요한 ‘쿨’함이 무엇인지 몸소 보여준다. 마음 같아서는 전국의 중고교 학생들을 전부 불러다 강제로라도 보여주고 싶다만 이러다 전국의 학부모들에게 미운털 박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장성란 기자 (FILMON)
<클로버필드>
<클로버필드>는 축제와 함께 시작한다. 친구의 일본행을 기념하는 송별 파티. 몇몇은 슬프지만 파티에 참가한 대부분은 즐겁다. 그런데 난데없이 들려오는 폭음과 비명. 자, 이쯤 되면 감이 올 거다. 뉴욕 시내에 정체 모를 괴물이 출연했고, 어딘가에서 슈퍼 히어로가 등장해 괴물을 처치하고, 뉴욕은 영웅을 향한 박수갈채로 가득 찰 거다. 그런데 이 영화에는 슈퍼 히어로는 커녕, 괴물과 맞상대할 인물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저 생존을 위해 도망치고 또 도망칠 뿐이다. 존재의 이유에 고민? 그건 사치다. <클로버필드>는 정체모를 존재에 우왕좌왕하는 인물들은 사정없이 흔들리는 캠코더를 통해 담는다. 감독은 관객에게 괴물의 정체가 무엇인지 가르쳐주는 센스도 없다. 그래서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관객은 시각적 혼란은 물론 영화 속 인물들과 같은 정서적 혼란까지 겪게 된다. 이는 테러에 대한 불안감이자,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세상은 점점 명확해진다’는 신화에 대한 조롱이다. 영화를 보고 머리가 아픈 건 흔들리는 카메라 때문만은 아닐 거다. 안효원 기자(FILMON)
<플래닛 테러>
히스패닉계의 보석 같은 배우 프레디 로드리게즈의 영화가 올해 두 편이나 한국에 개봉한 건 기쁜 일이다. 하지만 둘 다 흥행과는 무관한 영화가 됐다는 건 슬프다. 앞서 언급한 <와인 미라클>에 이어 <플래닛 테러>까지. 맡은 역할은 달라도 자신만의 긍정적인 아우라를 뿜어낼 줄 아는 로드리게즈의 매력이 더 많이 알려졌으면 하는데 말이다. 물론 <플래닛 테러>가 흥행작이 안 된 이유는 어느 정도 납득이 된다. ‘동시 상영하는 B급 영화’라는 지극히 미국적인 문화를 부활시킨 것인데다, 로버트 로드리게즈 식 악취미가 총집합된 이 장난스러운 영화가 많은 관객에게 환영받길 원하는 건 무리다. 그러나 함께 기획된 쿠엔틴 타란티노의 <데쓰 프루프>와 떨어져 뒤늦게 개봉했다는 점, 그 사이 불법 파일 공유로 볼 사람은 이미 다 봤다는 사실을 상기해 보면 역시 억울하다. 애초의 기획을 그대로 살려 적절한 시기에 개봉했더라면, 대박까지는 아니더라도 7~80년대 ‘B급좀비SF엽기호러물’에 대한 21세기적 해석이 좀 더 많은 관객의 웃음과 함께 했을 지도 모른다. 정미래 기자(FIL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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