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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쌍화점>에 대한 기사는 쓰지 않으려고 했다. 기자 생활을 시작할 때 들었던 한 선배의 조언 때문이다. “나쁜 걸 욕하기는 쉽다. 좋은 게 왜 좋은지 쓰는 게 중요하다.” 그 후로 영화에 대해 비판하기보다는, 좋은 영화를 찾아 장점을 쓰는데 매진했다. 어차피 같은 돈 내고 영화 보는 것인데, 독자들과는 영화에 대한 유쾌한 대화를 나누고 싶다. 그래서 <쌍화점>은 빗겨가기로 마음을 먹었었다. 언론 시사회에서 만난 <쌍화점>은 너무 실망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화주간지를 비롯한 언론의 평가는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 순간 ‘내가 영화를 잘못 봤나’ 하는 의심이 들기도 했다. 이제 <쌍화점>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쌍화점>은 왕과 홍림, 홍림과 왕후, 왕후와 왕의 엇갈린 사랑이 비극적 운명을 맞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 이야기의 가장 큰 축인 홍림(조인성)과 왕후(송지효)의 사랑의 근원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홍림은 ‘여자를 품을 수 없는 왕(주진모)’ 때문에 왕후와 합궁을 한다. 이것이 이들 사랑의 시작이다.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다. 그동안 여자를 경험하지 못했던 남자가 여자를 품었기 때문에 사랑이 시작된다는 건 억지다. 

백 번 양보해, 한 순간의 교감으로 둘의 사랑이 시작됐다고 치자. 그런데 그 사건 이전의 세 인물의 관계를 살펴보면, 홍림과 왕후의 감정 변화는 납득하기 힘들다. 애초 홍림과 왕후의 관계는 썩 좋은 편이 못됐다. 왕후가 몽고에서 시집을 왔을 때 왕의 곁에는 홍림이 있어서 왕과 가까워지지 못한다. 거기서 오는 외로움과 증오, 이것이 홍림에 대한 감정이었다. 그런데 몇 번 육체적인 관계를 가졌다고 해서 그게 눈 녹듯 사라질 수 있을까. <쌍화점>의 사랑을 두고, ‘치명적’이라고 하는 것은 설득력 없는 감정을 포장하려는 화려한 수사에 불과하다.

<쌍화점>은 홍림과 왕후의 사랑의 근원은 물론, 관계 발전의 양상을 섬세하게 포착하지 못한다. 사랑이 비극적인 것이 되려면, 그 사랑이 절정에 치달았을 때 이루어질 수 없는 것으로 전이돼야 한다. 그들의 사랑이 절정으로 오른 것처럼 보이려면, 인물들의 감정이 변화하는 과정이 섬세하게 그려야 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는 과잉된 감정만 난무할 뿐, 인물들의 섬세한 감정 변화는 없다. 홍림과 왕후는 사랑을 느끼는 순간부터 절정의 감정을 느끼고, 시종일관 그 절정을 보여주기에 급급하다.

그 결과 사랑과 아픔이라는 추상적 정서와 왕의 눈을 피해 밀회를 나누는 에피소드만이 지루하게 반복된다. 애초 ‘홍림과 왕후가 서로에게 무엇이 끌렸는가’에 대한 답이 없이 이야기를 전개했기 때문이다. 서로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행동을 좋아하는지에 대한 히스토리가 없으니까, 그저 말이 필요 없는 ‘사랑의 행위’만 반복된다. 영화에 등장하는 정서는 ‘사랑’ ‘격정’ ‘그리움’ 등 사랑에 대해 익히 알고 있는 추상적인 관념일 뿐, 홍림과 왕후가 나누는 정서적 교감은 없다.

멜로영화의 핵심은 인물들이 ‘왜’ ‘어떻게’ 사랑을 나누는가이다. 하지만 <쌍화점>은 원인과 전개 두 요소 모두 설득력을 갖고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진지한 분위기에서도 헛웃음이 나오고, 배우들의 열연에도 불구하고 지루함을 느끼게 된다. 또 한 때 애국과 충의를 목숨처럼 여기던 이들이 사랑 앞에서 모든 것을 헌신짝처럼 버릴 때, 그들의 사랑조차 공허하게 느껴진다. <쌍화점>을 산에 비유하자면 산등성이 없는 정상에 비유할 수 있다. 비록 정상에서 바라보는 세상이 아름답다고 하나, 산을 오르는 과정이 없었다면 그게 과연 얼마나 아름다울까. 안효원 기자(FIL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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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농촌총각 2008/12/31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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