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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 시간이 흐를수록 성장하고 늙어가는 것. 이것이 누구나의 인생일 것이다. 그러나 노인으로 태어나 성장할수록 아이가 되는, 지팡이를 짚던 유년기를 지나 네발로 기는 노년기로 향하는 벤자민 버튼의 이상한 이야기 역시 누구나의 시간의 흐름에 관한 의미 있는 성찰을 대신하기 충분하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이하 <벤자민 버튼>)는 대자연의 흐름이라고 생각했던 '노화'라는 벡터를 거꾸로 뒤집은 역발상의 판타지이지만, 동시에 성장하고 어른이 되고 또 늙어가는 동안에도 전혀 의식하지 못한 인생의 한 지점 한 지점에 가치를 부여하는 멋진 우화이자 지침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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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화로운 문화로 대변되는 1920년대 당시 미국의 시대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여기에 서린 빛과 그림자를 주로 작품화했던 피츠제럴드는 <벤자민 버튼>을 통해 성공을 향해가는 젊은이의 허무한 죽음이라는 주제를 기묘한 상상력으로 구현하며 자신의 재능을 실험했다. 소설은 벤자민의 아버지 로저 버튼이 산부인과 병원 요람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백발이 성성한 벤자민 버튼을 마주하며 시작한다. 의사는 자신의 명성에 해를 끼치는 이 요상한 상황에 대해 분노해 로저를 저주하고, 로저 역시 그 존재만으로도 남부 사교계에 망신이 될 게 뻔한 벤자민의 존재가 맘에 들지 않는다. 그러나 이내 바닥까지 닿을 것 같은 벤자민의 수염을 자르고 백발을 염색하고 자신과 엇비슷한 키의 장신인 그에게 우스꽝스런 아이 옷을 입히며 평범한 아이가 될 것을 종용한다. 하지만 노인의 모습으로 태어난 벤자민은 (당연한 얘기지만) 딸랑이를 흔드는 것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보며 시간을 보내고 아버지의 시가를 훔쳐 피며 여가시간을 즐긴다. 벤자민 버튼은 자신이 새총을 가지고 놀다 창문을 깨뜨렸을 때 은근히 뿌듯해하던 아버지를 배려하기 위해 날마다 무언가를 일부러 깨뜨리는 사려 깊은 늙은 어린이였던 것이다.
이렇듯 소설 <벤자민 버튼>은 허리가 굽은 노인으로 태어나 암울한 ‘늙은 유년기’를 보내고 존경받아야 할 노년에 코흘리개가 되는 벤자민의 갖가지 해프닝에서 집중한다. 벤자민의 기묘한 성장과 그로 인한 웃음에 초점을 맞추는 소설은 장난감 총이나 가지고 놀 법한 꼬마의 모습으로 군대에 복귀한 벤자민이 장성한 자신의 아들에게 매달려 울면서 돌아오고, 축구선수로도 절정의 기량을 선보인 그가 점점 줄어드는 체격 때문에 실의에 빠지고, 벤자민의 역행하는 시간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아내와 아들이 제발 젊어지길 멈추라며 다그치는 등의 어긋난 시차를 이용한 유머와 적확한 은유를 그 기반으로 한다. 결과적으로 아이가 있어야 할 곳에 노인을 배치하고 노인이 있어야 할 곳에 자리한 아이의 모습은 그의 인생을 바라보는 외부의 편견, 그 거대한 세계가 보내는 그릇된 시선을 향한다. 특별한 그의 삶이 만들어내는 에피소드들은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지만 이는 또한 어느 누구나의 삶에 자리한 절정과 쇠락의 순간과도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렇기에 벤자민 버튼의 삶은 어느새 인생이라는 자연스러운 흐름에 관한 익숙하고도 낯선 이야기가 된다.
1922년 잡지 <콜리어스>를 통해 세상에 처음 소개된 <벤자민 버튼>은 86년이 지난 2008년 마침내 피츠제럴드가 그렇게 바라마지 않던 영화화되어 21세기의 관객과 마주하게 된다. 데이빗 핀처에 의해 영화화가 결정된 순간부터 피츠제럴드의 단편소설은 다시금 세간의 관심을 끌며 갖가지 판본으로 재출간되기 시작했고 이 중 그 기폭제가 된 <벤자민 버튼>은 케빈 코넬에 의해 만화로도 만들어진다. 만화 <벤자민 버튼>은 다양한 그래픽노블을 작업했던 눈지오 드필리피스와 크리스티나 위어 콤비의 각색으로 피츠제럴드의 냉소 어린 원작의 내용을 별다른 가감 없이 만화로 옮기고 있다.
빛바랜 세피아 톤으로 고풍스런 시대상을 구체화하고 있지만 시시각각 젊어지는 벤자민의 역동적인 변화에 중심을 둔 만화는 원작의 밝은 분위기를 더욱 배가하는 데 주력한다. 케빈 코넬의 만화는 자신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젊어지는데 비해 계속 늙어가는 부인에 대해 점점 성적 매력을 잃어가노라고 고백하는 벤자민의 말마따나 기묘한 성장과 그로 인한 웃음을 원작의 핵심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데이빗 핀처에 손에 맡겨진 <벤자민 버튼>은 오직 원작에서 가져온 것은 설정뿐이라는 듯 확연히 다른 분위기와 메시지로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를 구축한다.
노인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그저 늙은 아이로 태어난 갓난아기 벤자민. 어머니는 그를 낳다 세상을 떠나고 벤자민의 아버지는 이를 저주해 그를 양로원 현관 앞에 버린다. 누가 봐도 흉칙한 외모였지만 양로원에서 노인들을 돌보는 흑인 여인 퀴니는 그를 신의 축복으로 생각하고 양자 삼아 키운다. 벤자민은 노인들에 비해 몸은 작지만 자신처럼 걷지도 보이지도 잘 들리지도 않는 데다가 때때로 정신도 오락가락한 노인들 속에 섞여 퀴니의 사랑을 받으며 성장한다. 그렇게 언제나 어머니로부터 자신의 특별함에 대해 교육받던 그는 어느 날 점차 젊어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영화 <벤자민 버튼>은 전쟁에서 죽은 아들이 되돌아오기를 바라며 거꾸로 가는 시계를 만든 어느 시각장애인 시계공의 우화로 문을 연다. 데이빗 핀처 감독은 벤자민에게 소설처럼 화려한 삶을 선사하지 않는 대신 진실한 가족과 친구를 통해 자신의 특별함을 자연스럽게 인지하면서 자신의 삶을 저주하지도 좌절하지도 않는 벤자민의 이야기를 담담히 펼치는 데 힘쓴다. 미국으로 온 피그미족과 우정을 나누면서 남과 다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자신을 '아티스트'라고 여기는 거친 뱃사람을 따라 세계를 종횡하며 자신 역시 무엇이든 될 수 있음을 깨달아가며, 그는 그렇게 세상을 배운다. 또 누구나처럼 한 여인을 만나 뜨거운 사랑을 하고 또 계속해서 젊어져 언젠가는 어려질 수밖에 없는 자신을 깨닫고 이별을 선언한 뒤 멀찌감치에서 세상을 겉돌며 그녀를 무구히 그리워한다. 초대형 허리케인이 불어 닥치기 일보직전인 상황에서 담담히 벤자민 버튼(브래드 피트)의 일기를 읽어 내려가며 그의 전생을 더듬는 연인 데이지(케이트 블란쳇)처럼 영화는 원작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으로 벤자민 버튼의, 그리고 인생이라는 깊고 깊은 태풍의 눈에 접근하는 것이다.
벤자민 버튼이 '삶이란 주어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라는 담담한 가르침을 조용히 읊조리는 순간, 영화에는 원작에서는 느낄 수 없는 깊은 감동과 깨달음이 서린다. 할리우드의 가공할 분장기술과 CG는 벤자민 버튼 역의 브래드 피트를 병든 7살 어린아이에서 삶을 달관한 노회한 젊은 노년기까지 유려히 이끌어내지만, 스타일리스트 데이빗 핀처가 선사하는 이 특별한 볼거리나 영화 곳곳에 서린 위트, 빼어난 구성이나 절묘한 상징에 비할 수 없을 만큼 영화 속 벤자민의 삶은 그 자체로 감동적이다. 남과 다른 시간 속에 수많은 사건을 겪으면서도 특별한 삶이라기보다는 누구나의 삶과 같은 모습으로 와 닿는 벤자민 버튼의 삶은 수많은 사람들과 교차하면서도 오로지 그들이 전해주는 진실한 교훈만을 얻으려 했던 벤자민 버튼의 정직함과 맞닿는다. 어느 순간 정말로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그의 삶을 뒤쫓는 것만으로도 마치 우리들의 다가올 미래와 삶을 반추할 의미 있는 태도마저 완성되는 듯하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이를 먹어갈 때 자신은 다른 시간을 살아야 한다는 것은 분명 슬픔이다. 그러나 피츠제럴드가 이를 슬픔이 아닌 아이러니나 유머를 통해 우회적으로 풀어낸 데에 비해 핀처의 영화는 이를 인생이라는 거대한 아이러니의 일부분으로 녹여낸다. 피츠제럴드는 “인간이 80세로 태어나 18세를 향해 늙어간다면 인생은 무한히 행복하리라”는 마크 트웨인의 말에 영감을 받아 <벤자민 버튼>을 썼노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영화 <벤자민 버튼>은 이런 환상으로도 결코 충족될 수 없는 인생의 일면을 그리는 동시에 ‘무한한 행복’을 향한 깊은 성찰로 마크 트웨인의 명언을 재해석한다. 86년의 시간을 휘돌아 마침내 거꾸로 거슬러 오르는 벤자민 버튼의 인생을 영화로 선보이게 된 현재, 그 의미가 한 인간의 인생과도 맞먹는 86년의 시간 이상으로 농익어 인생의 기쁘고도 슬픈 일면 위에 안착한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다. 강상준 기자(FIL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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