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꾀병으로 조퇴한 소녀가 허름한 고시원 앞에서 안절부절 누군가를 기다린다. 혹시 누가 날 알아볼까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에 몸을 숨기며. 단정하게 차려입은 교복에 질끈 묶은 머리, 안경 쓴 얼굴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대한민국 여고생이다. 이윽고 교복 입은 소년이 소녀를 고시원으로 데리고 들어간다. 숨죽이고 발소리를 줄이며 자그마한 방으로 들어선 어린 연인은 오늘 ‘거사’를 치를 작정이다. 사귄 지 좀 됐고, 서로를 많이 좋아하며, 아마도 남자애가 꽤 졸랐을 터다.

불운한 일로 가족과 떨어져 혼자 고시원 생활을 하는 소년은 소녀의 동정심에 불을 붙였을 것이다. 언젠가는 할 첫 경험, 소녀는 용기를 내 몸을 맡기기로 한다. 소년은 “니가 세상에서 제일 예뻐”라는 뻔하고 달콤한 말로 소녀의 몸과 마음을 완벽히 무장해제 시킨다. “많이 아프다던데.” 겁내던 소녀는 결국 소년을 받아들이고, 뭐가 뭔지 모를 이상하고 아픈 첫 경험을 치르게 된다.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말을 들은 뒤에 접한 아주 쌉싸래한 경험이다. 어쨌든 해냈고, 만족스럽진 않지만 뿌듯하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다.

제11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아시아 단편경선에 출품된 <내게 사랑은 너무 써>는 섹스에 대한 보수적인 관념이 팽배한 대한민국에서 여성이 겪어야하는 잔혹한 첫 경험을 극단적으로 담아낸 영화다. 자그마한 소리조차 새어나가는 좁은 고시원에서 어린 연인이 벌인 대낮의 ‘합궁’을 옆방 남자가 듣게 되면서 소녀의 달콤쌉싸름한 첫 경험은 끔찍한 잔혹사로 돌변해버린다. 옆방 남자는 소년이 잠깐 나간 사이에 소녀가 있는 방으로 벌컥 들어와 전화 좀 빌려 쓰자고 부탁한다. 남자가 받아든 소녀의 휴대폰엔 딸이 조퇴한 사실을 알게 된 엄마가 건 부재중 전화 내역이 찍혀 있다.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벌인 애정 행각에 심기가 매우 불편한 어른은 “네 엄마한테 다 이른다”고 협박한다. 소녀는 이 일을 엄마가 알게 될까 두렵다. 옆방 남자는 “학생이 공부는 안 하고 뭐하는 짓이냐”고 훈계를 하더니 결국 소녀를 성폭행하기에 이른다. 소녀는 누가 들을까봐 소리도 못 지른 채 끔찍한 일을 당하고 만다.

이 짧고 잔인한 에피소드는 답답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돌파한다. 대학진학이라는 목표 아래 억눌리고 갇힌 십대의 성(性)은 곰팡내 나는 고시원처럼 우울하고, 미친 남자의 성폭행처럼 잔인하다. 학생의 본분 운운하면서도 여고생을 통해 자신의 욕정을 채우는 옆방 남자는 십대의 성을 지하에 가둬놓고 그것을 이용해 이익을 챙기는 이들의 비열함을 함축하고 있다. 소녀가 옆방 남자에게 당하고 있음에도 아무런 손을 쓰지 못하고 문 밖에서 망설이는 소년의 모습에선, 자신들의 감춰야만 하는 경험이 탄로 난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어리석은 짓을 하게 된 소년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치를 떨게 만든다.


영화는 남자친구와 잤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성폭행 당한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수능시험 공부하는 소녀를 담담히 비추며 끝난다. 엄마는 열심히 공부하는 딸의 책상에 먹을 걸 놓아두고 간다. 소녀는 엄마가 설마 그 일을 알게 된 건 아닐까 흠칫 놀라고 눈치를 살핀다. 왜 그녀는 같은 여성인 엄마에게조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의 경험을 감추려고만 했을까. 아마 그녀의 엄마가 그랬을 것이고, 그 엄마의 엄마가 그랬기 때문은 아닐까. 자신의 성적 욕망도, 성적 피해도 모두 꼭꼭 숨겨야 했던 소녀는 과연 어떤 여성으로 살아가게 될까?

십대의 섹스와 성폭행이라는 격한 소재로 충격을 주지만 <내게 사랑은 너무 써>를 통해 전고운 감독이 전달하고자 한 것은 우리 사회의 보수적인 성 의식에 대한 일침이다. 비단 성적 욕망뿐 아니더라도, 정기적으로 산부인과에 가서 검진을 받아야 하고, 괴로운 월경전증후군이 피임약 복용으로 치료될 여지가 있음에도 이 땅의 여성은 쉬쉬하며 감추고 남의 눈을 의식해 피한다. 대한민국에서 처녀가 어떻게 산부인과를 드나들고, 어떻게 대놓고 피임약을 먹겠나. 이렇듯 엄마의 엄마 때부터 이어져 내려 온, 어렸을 때부터 짓눌린 성 의식은 자궁암 발병 여부를 정기적으로 체크하지 않고, 월경 전 신체적 고통도 그저 묵묵히 감내해야만 하는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사회가 어깨에 힘 좀 풀고, 여성 스스로 약간만 더 당당해진다면 여성이 여성답게, 좀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가능성은 훨씬 많아질 텐데 말이다. 정미래 기자(FIL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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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ditor. 2009/04/17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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