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 년 간 영화를 보고 평을 한 정성일 평론가가 결국 영화를 만들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라는 가제로 알려졌던 정성일 감독의 데뷔작 <카페 느와르>가 14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첫 선을 보였다.
유부녀 미연(문정희)과의 이뤄질 수 없는 사랑에 괴로워하는 영수(신하균), 영수를 미치도록 짝사랑하는 또 다른 미연(김혜나),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리는 선화(정유미)와 실연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퀵 서비스 배달원 은하(요조). 그리고 한 소녀. 이들은 뜻대로 안 되는 사랑 때문에 지독히 슬퍼한다.
<카페 느와르>를 보기 위해선 단단한 각오가 필요하다. 3시간 하고도 10분을 훌쩍 넘기는 상영시간에 거의 모든 장면은 정말, 지독하게 긴 롱 테이크다. 게다가 영화 속 인물들이 읊는 대사들은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야> 등 문학 작품 속에서 가져온 것이다. 시작부터 커다란 햄버거를 필사적으로 먹어치우는 소녀의 모습을 단 한 번의 컷도 없이 전부 보여주고, 표정 없는 얼굴로 책 읽듯 대사를 읊어대는 배우들을 시종일관 건조하게 담아낸다. 아주 많이 당황스럽다.
고행과도 같은 오래 찍기와 고색창연한 문어체 대사를 오기와 함께 관조하다가 이걸 끝까지 봐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시점에 다다르면 마치 숨은그림찾기처럼 나타나는 본심을 만나게 된다. 감독은 비장한 선율과 함께 훑어낸 청계천의 상가들, 제야의 종 앞에서 이뤄진 촛불집회, <디 워>와 <100분 토론>, 그리고 <극장전> <올드보이> <괴물> 같은 영화들을 능청스럽게 인용하며 통속적인 사랑 이야기 속에 자신의 정치적 성향과 종교적 신념, 문학과 영화에 대한 취향을 파노라마처럼 엮어냈다. <카페 느와르>는 굽이치는 만연체로 영화와 사회를 사유했던 평론가 정성일의 조금 다른 자기표현인 셈이다.
왼쪽부터 정유미, 김혜나, 정성일 감독, 허문영 프로그래머
정성일 감독과 배우 정유미, 김혜나가 참석한 GV에서 한 관객이 배우들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만약 정성일 감독의 연출작이라는 걸 모른 채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받았다면 과연 출연을 결심할 수 있었을까요?” 또 다른 관객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속 대사를 인용해 정성일 감독에게 이렇게 물었다. “도대체 이 영화를 왜 만든 건가요?”
두 가지 질문은 <카페 느와르>라는 영화에 대한 안내서가 된다. 도대체 왜 만들었는지 모를 지루하고 고통스런 영화는 연출자가 ‘정성일’이기 때문에 그럴만한 것이 된다. 정성일 감독은 “살기 위해서 영화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영화를 만들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그는 관객에게 굳이 이 영화를 잘 봐달라고, 이해해달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카페 느와르>는 그 누구도 아닌 정성일 자신을 위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정미래 기자(FILM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