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한국에서 ‘재개발’만큼 설레는 단어가 있었던가요? 별로 감흥이 없으시다면 ‘신도시’는 어떠신지. 부동산 가격의 무한 상승, 대출이자 부담을 사뿐하게 뛰어넘을 투기의욕만 존재한다면 장밋빛 미래는 여러분의 것이지요. 하지만 이 폭신폭신한 꿈 주변에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어떤 어둠 비슷한 것을 느끼게 됩니다. 박찬옥 감독의 <파주>는 바로 그 어둠에 대한 영화입니다.
중식(이선균)은 여러 가지로 불행한 남자입니다. 그는 대학생 시절, 학생운동에 가담했다가 경찰의 수배를 받게 됩니다. 중식은 수배를 피해 선배, 자영(김보경)의 집에 머물죠. 그런데 문제가 있어요. 이 자영이란 사람은 그냥 보통 선배가 아닙니다. 그녀는 중식이 짝사랑하는 여성이죠. 더구나 중식의 선배와 결혼을 했고 아이까지 있는 유부녀입니다. 그녀의 남편이 교도소에 갇힌 상황에서 그녀를 짝사랑하는 중식과 자영 그리고 자영의 갓난아기가 한 집에 머물고 있었던 겁니다. 여기서 아주 무서운 사건이 벌어져요. 중식은 이 사건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충분히 그럴만한 상황이었죠. 그는 묵직한 죄책감을 안은 채 파주로 떠납니다.
파주에는 또 다른 주인공들이 살고 있습니다. 은수(심이영), 은모(서우) 자매는 부모님이 남겨주신 복층 주택의 2층에서 마치 세입자처럼 살고 있어요. 1층을 전세주고 그 돈을 야금야금 까먹으면서 말이죠. 그러던 그들은 파주로 흘러 들어온 중식과 깊은 사이가 됩니다. 은수는 교회 공부방 일을 맡아보고 있는 중식에게 호감을 품었고, 안식과 평안이 필요했던 중식은 은수와 결혼합니다. 그리고 사건이 벌어져요. 은수가 죽습니다.
영화는 주인공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과 감정들을 미스터리형식으로 짚어갑니다. 박찬옥 감독은 이를 위해 사건의 시간 구성을 뒤섞었어요. 성인이 된 은모가 파주로 내려오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8년 전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현재로 돌아오고 7년 전으로 점프했다가 현재의 3년 전으로 이동합니다. 그리곤 마침내 현재에서 마무리되죠. 이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영화의 중심축을 이루는 중식이나 은모가 모두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모르고 있으리라는 혐의가 짙어집니다. 그래도 확실한 것이 있죠. 파주는 재개발 될 것이고, 그 곳에 살던 사람들은 신도시의 안개 속으로 뿔뿔이 흩어질 예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은모와 중식은 아무래도 형부와 처제의 관계를 넘어서려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죠. 은모는 필사적으로 철거반에 맞서는 ‘형부(그녀는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러서야 간신히 중식을 형부라고 부릅니다)’에게 묻습니다. “이런 일 왜 하세요. 이 일이 형부한테 무슨 보람이 되죠?” 중식은 대답합니다. “처음에는 멋져 보여서, 그 다음에는 갚을 게 많아서, 그리고 지금은 그냥 모르겠어. 늘 할 일이 생기는 것 같아.” 중식의 성의 있는 대답에도 은모는 답답할 따름입니다. “잘 모르겠어요”
영화의 곳곳에 등장하는 서우의 얼굴 클로즈업이나 그녀의 이동을 적당히 느리게 돌리는 화면은 아름답지만 마치 장송곡처럼 비장합니다. 은모는 은수의 죽음을 이해하고 싶었고, 중식은 세상이 달라지길 바랐지만 모든 것은 그냥 적당한 어둠과 시멘트 가루에 뒤덮입니다. 은모와 중식의 오묘한 감정역시 감당하기 어려운 이 시대의 개발광풍 속으로 서서히 사라져 갈 것입니다. 유주하 기자(FIL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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