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해운대 피프빌리지 야외무대에 브라이언 싱어 감독이 등장했습니다. 충격적인 반전의 <유주얼 서스펙트>(1996)로 데뷔, <엑스맨>(2000, 2003) 시리즈로 명실상부 할리우드 최고등급 흥행감독으로 성장한 바로 그 브라이언 싱어 감독 말입니다. 이 대단한 감독을 불러들인 이날 행사는 대담형식으로 진행됐습니다. 그 상대는 <장화, 홍련>(2003) <달콤한 인생>(2005)의 김지운 감독이었지요. 사실 별로 대단할 것 없는 이야기가 오갔어요. 김지운 감독이 “브라이언 싱어가 술을 아주 잘하더라. 보드카 많이 마시던데 주당 아니냐?”고 물으면 브라이언 싱어는 “그래도 난 먼저 들어갔다. 김지운 감독은 나 들어가던 때도 계속 마시더라. 당신이야말로 주당 아니냐”라고 답하는 식이었죠.
이걸 나쁘다고 할 수는 없을 겁니다. 항상 차기작에 대한 이야기, 전작에 대한 이야기로 일관하는 것도 지겨운 노릇이니까요. 여하튼 두 감독의 시절 좋은 이야기는 제법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이어졌습니다. 물론 새로운 이야기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브라이언 싱어 감독이 차기 <엑스맨> 시리즈의 연출을 맡을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네 맡을지도 모른다고 하네요. 맡을지도······. 확정된 것은 없고 얘기가 오가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눈 달린 사람은 수년 전에 인터넷으로 접했을 내용이 또 나왔어요. “당신 왜 <엑스맨 : 최후의 전쟁>(2006) 연출 포기했어?” “아, 그건 <슈퍼맨 리턴즈>(2006)을 포기할 수 없어서다. 나 <엑스맨: 최후의 전쟁> 무지 하고 싶었다” 같은 닳고 닳은 소식이요.
자 이 시점에서 궁금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도무지 이 먼 나라 그것도 부산까지 찾아온 나름 슈퍼스타 감독, 브라이언 싱어의 진짜 목적은 무엇이었을까요? 저렇게도 뻔한 말을 다시 한 번 반복하려고 여기까지 왔다면 좀 많이 이상하잖아요. 그러니까 이건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겠지만 브라이언 싱어는 제작자로서 영화제를 찾았습니다. 조금 있다 소개할 <트릭 오어 트릿>이 바로 그 작품이죠. 영화 얘기는 잠시 뒤로 하고, 브라이언 싱어의 이야기를 조금 더 하자면 저는 이러한 상황에 다소간 두려움을 느낍니다.
연출하기에도 눈코 뜰 새가 없을 이 스타 감독이 왜 굳이 제작에 손을 뻗는 걸까요? 전 이런 모습에서 할리우드 영화계의 진정한 공포를 느낍니다. 요즘 할리우드 감독들은 연출만 맡는 경우가 오히려 드물어요. 물론 제작을 직접 맡게 된다면 제작자의 간섭 없이 자신의 취향을 확실하게 반영하는 작업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현재의 할리우드를 살펴보자면 감독들의 제작 진출은 생존에 직결된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 영화가 흥행에 실패한다면 감독의 차기작은 물론 감독으로서의 운명까지 위태로워지는 요즘의 할리우드에서 감독은 제작자가 되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겁니다.
유능한 감독들은 작가로서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것은 물론 안정적인 작업환경을 위해 제작자의 역할까지 겸하려합니다. 이러한 시도가 제대로 성공한다면 감독으로서는 거의 무한의 자유가 가능해집니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말 할 것도 없겠죠. 아주 든든한 회사를 일궈냈으니까요. 북미 2009년 하반기 최대의 화제작 <디스트릭트9>은 제작자 피터 잭슨의 지위를 반석 위에 올려 놓았습니다. 감독들만 제작자를 꿈꾸는 게 아닙니다. 톰 크루즈, 드류 배리모어, 벤 스틸러 같은 배우들은 일치감치 제작에 야망을 두고 있었고, 우연인지 필연인지는 모르겠지만 할리우드의 큰손으로 성장했습니다.
<트릭 오어 트릿>은 브라이언 싱어의 제작자로서의 앞날을 가늠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브라이언 싱어가 연출가로서 독립성을 확보하는 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겁니다. 브라이언 싱어는 좋은 감독이자 동시에 뛰어난 상업영화감독입니다. 하지만 최근 발표했던 <작전명 발키리>(2009)나 큰 기대를 모았던<슈퍼맨 리턴즈>가 별반 큰 재미를 보지 못했잖아요. 본인으로서는 절박한 생각이 들 수밖에요. 마켓으로서는 다소 빈약하다고 알려져 있는 부산영화제에까지 달려온 것만 봐도 알아챌 수 있는 사실입니다.
그럼 <트릭 오어 트릿>은 도대체 어떤 영화일까요? 브라이언 싱어가 제작하고 <슈퍼맨 리턴즈>의 작가였던 마이클 도허티가 연출을 맡은 <트릭 오어 트릿>은 할로윈을 배경으로 하는 저예산 공포영화입니다. 적당한 시점에 관객을 놀라게 하고 역시 적당한 시점에 누군가 죽어나가지요. 영화는 대략 5가지 에피소드의 집합체입니다. 호박등(‘잭 오 랜턴’이라고 해야할까요?)의 촛불을 꺼버렸다가 봉변을 당하는 남녀, 사탕을 밝히다 무시무시한 교장선생님에게 발각당한 그야말로 불쌍한 비만아가 등장하고, 곧 막간극처럼 뱀파이어 시퀀스가 이어져요. 귀여워 보이는 네 명의 아이들은 제법 끝까지 갈 거 같더니만 장난 한 번에 훅하고 가버립니다. 마지막 이야기는 비밀로 하겠습니다. 얘기를 시작하면 스포일러를 피하기 어려울 것 같으니까요.
5개의 에피소드들은 각기 미국의 오랜 괴담, 귀신들을 적절하게 활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공포영화는 묘하게 웃겨요. 잔뜩 긴장하게 만들어 놓고는 허를 찌르거나 어처구니없이 앙증맞은 장면을 연출하기도 합니다. 다소간 공포영화 자체에 대한 블랙코미디로 받아들일 수도 있고 말이죠. 이 똑똑하고 날렵한 공포영화에서 단 한 가지 문제점이 있다면 이렇다 할 스타배우가 없다는 사실 정도일겁니다. 하지만 공포영화에서 이게 어디 흠이던가요? 어차피 누군가 죽어야 되는 게 이 장르의 특성이니 말입니다.
영화의 운명은 다소 기구했어요. <슈퍼맨 리턴즈>의 부진 덕분에 같은 제작자(싱어는 <슈퍼맨 리턴즈>의 제작까지 맡았습니다), 그리고 <슈퍼맨 리턴즈>의 각본가였던 마이클 도허티가 연출을 맡은 이 영화는 2007년 완성됐지만 자연스럽게 개봉이 연기되고 말았습니다. 2008년에 할로윈을 노린다는 소문도 잠시, 2009년 10월 북미에서 그냥 DVD로 직행했어요. 아쉬운 일입니다. 과연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할로윈에 <트릭 오어 트릿>을 극장에서 만나 볼 수 있기를 소망해 봅니다. 브라이언 싱어의 장래를 위해서도 그렇지만 그냥 이렇게 사라지기엔 너무나 아까운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유주하 기자(FIL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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