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 사건, 감춰진 진실, 말 없는 용의자, 그리고 뛰는 형사. 범죄 스릴러를 표방한 두 영화 <백야행>과 <시크릿>은 비슷한 장르인데다 비슷한 시기에 개봉관에 걸린다는 것 외에 또 하나의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지나친 장식성이 본질을 흐리고 있다는 것. 빼어난 원작과 반짝이는 아이디어로 출발했지만 장르의 관습에 갇히고 스타일만 좇은 나머지 공허함만을 안기고 말았다. 웰메이드가 될 수 있었으나 아쉬움만을 남긴 두 편의 영화를 통해 한국 범죄 스릴러의 현주소를 살펴본다.
[미래] <시크릿>이 오늘 개봉을 했는데요. 올해 마지막 한국 스릴러가 될 거 같죠. 무엇보다 <세븐 데이즈>(2007) 각본을 쓴 윤재구 감독의 연출작이라는 점에서 눈길을 끄는데요.
[성란] <세븐 데이즈>가 어떤 작품입니까. <추격자>(2008)와 함께 한국 스릴러의 완성도를 한 단계 끌어올렸다고 평가 받는 작품이잖아요. <시크릿>도 그 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 것 같죠? 포스터에 ‘<세븐 데이즈>의 원작자 윤재구 감독의 영화’라는 홍보 문구를 대문짝만하게 써놨던데요.
[미래] 근데 막상 본 영화는 맥이 빠지던데요.
[성란] 네. 안타깝더라고요. 굳이 <세븐 데이즈>와 연결되는 점을 찾자면 남녀 주인공 이름이 각각 성열과 지연이라는 점과 아이 잃은 엄마의 슬픔으로부터 스릴러를 뽑아낸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거예요. <시크릿>의 지연(송윤아)은 차 사고로 아이를 잃고 극심한 슬픔에 빠져 일(?)을 저질러요. <세븐 데이즈>도 지연(김윤진)의 아이가 유괴되는 데서부터 시작하고요. 하지만 <세븐 데이즈>의 지연이 슬픔을 동력 삼아 아이를 되찾기 위해 엄청난 기세로 움직이는 데 반해 <시크릿>의 지연은 슬픔에 잠겨 죽은 듯 살죠. 대신 이번에는 그의 남편 성열(차승원)이 지연을 지키기 위해 동분서주해요. 그 점에서부터 <시크릿>은 <세븐 데이즈>와 다른 길을 가는 것 같아요. 전 <시크릿>을 보면서 <세븐 데이즈>보다 얼마 전에 본 <백야행>을 떠올렸어요.
[미래] 정말이지 영화를 보고 나서 딱 <백야행>이 떠오르더군요. <백야행>을 보는 내내 들었던 것과 비슷한 종류의 의아함이 <시크릿>을 보면서도 들었죠. 두 영화 모두 과한 스타일이 스릴을 헤친 느낌이 심하게 들죠.
[성란] 어머! 제 느낌도 그랬어요. 앞뒤가 착착 맞아떨어지는 이야기로 극에 빠져들게 만들거나 주제를 깊게 파헤치기 앞서 세련된 스릴러로 보이려는 욕심을 부린 것 같은 느낌! 한마디로 부족한 이야기, 과도한 스타일.
[미래] <시크릿>은 그 동안 형사 범죄물에서 무수히 보아왔던 장치들을 마구 나열한 듯한 인상을 줘요. 살인 사건, 감춰진 진실, 의문의 용의자, 고군분투하는 형사, 어리바리한 양아치 그리고 미친 카리스마를 내뿜으려 애쓰는 악당.
[성란] 네. 범죄 스릴러 장르의 관습들을 한데 묶은 것 같다고 할까요? 관습이 꼭 나쁜 건 아니에요. 관습을 잘 활용하면 관객을 손쉽게 극에 끌어들일 수 있죠. 그러려면 관습이 이야기에 잘 녹아들어야 하는데 <시크릿>은 그렇지 않아요. 이야기는 헐거운데 관습에 관습이 더해지고 거기다 겉치장까지 무거워요.
[미래] 무엇보다 저를 가장 황당하게 만들었던 건 주인공의 ‘스타일’이었어요. 아무리 엣지 있는 스타일을 추구하는 영화라고 해도 범인 잡으러 뛰어 다닐 때 전혀 도움되지 않는 완벽한 핏의 수트를 고수하는 형사 성열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될 지 정말 모르겠더군요;;
[성란] 그 구두는 어쩔 건데요.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의 형사들을 보세요. 전부 점퍼에 청바지, 운동화 차림이잖아요. 언제 범인을 쫓아 달릴지 모르는데 코가 날렵하게 빠진 구두를 신고 다니는 게 도대체 말이 된단 말입니까!
[미래] 내 말이요.
[성란] 물론 <M>(2007)이나 <박쥐>(2009)처럼 극단의 스타일을 실험하는 영화였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죠. 하지만 <시크릿>은 분명 우리가 사는 현실을 무대로 있음직한 이야기를 그리는 영화란 말이에요. 그런데 그런 영화의 주인공으로 나오는 형사가 특별한 이유도 없이 패션 모델처럼 고급 양복에 구두를 신고 앞머리를 길게 내리고 다니는 걸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러니 영화의 현실감이 떨어질 수밖에요. 어디 그뿐인가요? 성열이, 앤티크 가구들이 가득 차 있는 강남 한복판의 고급 주택에 산다는 설정도 터무니 없어요.
[미래] 무슨 CF의 한 장면 같더군요.
[성란] 아니나다를까, 그에 대해 영화가 아무 설명을 안 해요. 그저 부자 부모를 뒀나 보다, 하고 넘기는 수밖에요.-_-;
[미래] CF나 패션 화보를 연상시키는 허세 가득한 공간 속에서 아이를 잃은 엄마의 슬픔과 아내에게 큰 빚을 진 남자의 죄의식을 표현하려 하니 겉돌기만 할 뿐이죠.
[성란] 네. 그렇게 무리한 장치를 쓴 이유가 궁금해요. 단순히 고급스러운 화면을 얻기 위해 그런 무리수를 둔 걸까요? 스타일에 너무 신경 쓴 나머지 정작 중요한 이야기를 챙기지 못한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어요.
[미래] 전 지연이 '핑크 바이올렛'이란 립스틱 이름을 내뱉는 순간부터 머리가 멍해졌어요. 그 뒤부터 핑크 바이올렛, 핑크 바이올렛, 핑크 바이올렛…이 뇌를 지배하는 듯한 이상한 기분에 빠졌죠.
[성란] 올 겨울 신제품으로 ‘핑크 바이올렛’ 립스틱을 내놓은 화장품 회사에서 협찬 받은 게 아닐까요?-_-; 뻔뻔한 광고 같았어요.
[미래] 올 겨울 립스틱 트렌드인가…;;
[성란] <시크릿>은 소품, 색조, 미술뿐 아니라 캐릭터의 특징까지 너무 대놓고 보여줘요. 류승룡이 연기하는 재칼을 좀 보세요. 번들거리는 뱀 가죽 무늬 양복 재킷을 줄기차게 입고 나오는 것만 봐도 이 인물이 얼마나 장식적이고 전위적인지 알 수 있어요.
[미래] 그냥 저렇게 튀는 악역 하나 있어줘야 스타일이 산다, 이런 이유로 집어 넣은 캐릭터로 밖에 보이지 않더군요.
[성란] 영화가 재칼에게 남다른 특징을 굉장히 많이 부여하고 있잖아요. 그 이상한 군것질거리하며 자칼 성대모사라도 하는 건지 입으로 이상한 소리 내는 거 하며.
[미래] 재칼을 <다크 나이트>(2008)의 조커(히스 레저)와 비교하는 보도자료를 보고 경악..
[성란] 커헉!@_@; 그러고 보니까 정말 <다크 나이트>의 조커처럼 기묘하게 광적인 느낌을 주는 악역을 생각하고 만든 인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네요. 하지만 <시크릿>은 <다크 나이트> 같은 판타지가 아니에요. 정확히 말하자면 현실감과 장식성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는 스릴러죠. 그러니 잔뜩 멋을 부린 재칼 같은 인물이 자연스럽게 영화에 섞이지 못하고 붕 뜰 수밖에요.
[미래] 아니나 다를까. 캐릭터들이 각각 따로 노는 느낌이 심하게 들죠. 아내가 진짜 살인자 인가..?라는 의문에 집중해야 하는데, 자꾸 이상하게 흐름을 깨버려요.
[성란] 인물들이 각자의 특징과 갈등을 보여줄 뿐 서로 부딪치면서 점점 변해가는 과정이 전혀 그려지지 않고 있어요.
[미래] 그냥 각각 원맨쇼를 하는 듯하죠.
[성란] 그러니까 당연히 이야기 자체도 자연스럽게 무르익지 않죠. 다른 인물과 소통하지 않기로는 지연이 최고에요.
[미래] 정말 최고죠;;
[성란] 근래 한국영화에 나온 인물 중에 가장 답답한 여자였어요.
[미래] 전혀 치명적이지 않은 팜므파탈이라고나 할까요. 그냥 ‘나쁜 여자’, 나쁜 캐릭터일 뿐.
[성란] 그냥 ‘아이를 잃고 슬픔에 잠긴 여자’란 열 두 글자 안에 갇힌 여자 같아요. 그만큼 평면적이에요. 지연은 갑자기 아이를 잃고, 그에 얽힌 비밀을 알게 되고, 1년이란 시간을 보낸 끝에 엄청난 결정을 내려요. 그 심정이 얼마나 복잡하겠어요. 지연의 복잡한 심정을 세밀하게 그려야 영화 전체가 설득력을 가질 텐데 <시크릿>은 그저 지친 표정으로 남편인 성열을 상대하지 않는 지연의 모습만 보여줘요. 그 모습이 얼마나 단조로운지 나중엔 제가 다 지연한테 짜증이 나더라고요.-_-;
[미래] 차승원이 목숨 걸고 지켜주려 하는 게 전혀 이해되지 않죠.
[성란] 네. 뭐 이렇게 못된 여자를 끝까지 지켜주겠다고 몸부림을 치나 싶은 게. 솔직히 지연의 매력이 뭔지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성열이 왜 그토록 지연을 지키려 하는지, 영화의 가장 중요한 전제를 납득할 수 없어요.
[미래] 어찌나 얄팍하게 위기의 부부를 그려냈는지, 그리고 또 그 위기라는 게 어찌나 뻔한지. 마치 <부부 클리닉 사랑과 전쟁>의 한 에피소드를 보는 듯 하더군요. 재칼의 비호감 개인기를 줄이고 지연에게 더욱 집중하는 게 좋았을 뻔했어요.
[성란] 네. 재칼은 하도 혼자서 장식적인 연기를 하니까 점점 코믹한 느낌으로 빠지던 걸요.-_-; 나중엔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왔어요. 진지한 장면에서 조차.
[미래] 몇 가지 사건을 버무린 입체적인 구성에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진실을 파헤치는 아이디어 자체는 나쁘지 않아요.
[성란] 사실 그런 이야기야말로 스릴러에 제격이죠. 근데 이야기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려면 인물의 성격을 입체적이고 복합적으로 그려야 하는데 <시크릿>의 인물들은 너무 평면적이에요. 그러니 이야기가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삐걱댈 수밖에 없죠.
[미래] 반전에만 너무 집착해서 이야기를 끌고 가 급하게 마무리하는 데에만 기력을 쏟아 부은 것 같죠.
[성란] 네. 그래서 결정적인 순간 이야기가 맥이 풀린다고 할까요?
[미래] 결국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건, 스릴을 만들어 내는 건 ‘인물’인데, 인물 대신 스타일에만 힘을 썼으니..
[성란] 네. 설정만 있고 발전이 없어요.
[미래] 그렇게만 했다면 정말 홍보 문구가 주장하는 데로 ‘웰메이드 스릴러’가 될 수 있었을텐데 말이죠.
[성란] 웰메이드는 결국 굉장히 장르적일 수밖에 없어요. 작가주의 영화가 기존의 장르적 관습을 깨고 그 감독만의 새로운 주제, 형식, 스타일을 자유롭게 실험하면서 스스로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간다면 웰메이드는 그 반대라고 할 수 있죠. 기존의 장르적 관습과 장치를 적절히 섞고 비틀면서 대다수 관객들에게 재미와 감동을 주는 영화를 말하는 거잖아요.
[미래] <시크릿>은 기존의 관습을 산만하게 답습한 느낌이죠.
[성란] 네! 웰메이드가 많이 만들어진다는 건 그만큼 영화 시장이 양적으로 또 질적으로 어느 수준 이상으로 발전했다는 말이기도 해요. 웰메이드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장르의 토대가 갖춰져 있어야 하고 또 그걸 즐길 만한 특정 규모 이상의 소비자, 즉 대중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니까요.
[미래] 그러니까 더욱 찰지게 만들어야 되는데 말이죠. 그냥 대충 <추격자>(2008)나 <범죄의 재구성>(2004)의 분위기만 따라간다고 다가 아니잖아요.
[성란] <범죄의 재구성> <세븐 데이즈> <추격자> 같은 웰메이드 스릴러가 있었기 때문에 <시크릿>이 '웰메이드 스릴러'를 표방하고 나설 수 있었던 거 아니겠어요?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한국영화가 부흥기를 맞으면서 다양한 장르에서 웰메이드 영화들이 쏟아졌잖아요. 그런 영화들이 한국 대중영화의 질을 한 단계 높인 건 사실이에요. 확실히 지금 한국의 대중영화는 1980년대와 비교할 때 짜임새는 촘촘하고 볼거리도 다양하고 스타일은 감각적이니까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시크릿>은 한국 웰메이드의 세 가지 유산 중에서 오로지 스타일만 물려받은 것 같아요.
[미래] 그러게 그 '스타일'만 유독 많이들 이어받죠. 그게 제일 쉽기도 하구요.
[성란] 그건 속 빈 강정, 팥 없는 찐빵 아닌가요?
[미래] 전 스타일 좋은 영화 무지 좋아해요. 재미있는 내용 예쁘게 보여준 거, 영화가 지닌 커다란 미덕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 스타일이 과장되고 촌스럽다면, 그리고 그게 영화를 지배한다면 매우 곤란해지는 거죠..
[성란] 사실 다른 건 다 무시하고 시각적인 면만 따진다면 <시크릿>은 매우 세련되고 안정적인 영상을 선보이는 편이에요. 근데 그 안에 담긴 내용물이 알차지 못해서 속 빈 강정처럼 느껴진다는 게 문제죠.
[미래] 그런 거 있잖아요. 아무리 비싸고 멋진 옷과 액세서리가 있어도 그것을 전체적으로 어우러지게 착용하지 않으면 촌스럽게 보이는 거.
[성란] 졸부들이 마구 차려 입은 듯한 느낌 말이죠?
[미래] 그렇죠. 이런 스타일 때문에 영화가 갖고 있는 최소한의 장점마저 희석되어 버리니 참으로 안타깝더군요.
[성란] <시크릿>의 결말에 가면 이 영화의 이야기가 허술하다는 게 확실히 드러나요. 개인적으로 스릴러의 관습 중에 제일 촌스럽다고 생각하는 게, 지금까지 어느 누구에게도 정체를 들키지 않았던 범인이 결말에 갑자기 본색을 드러내면서 자기 입으로 이러이러하게 범죄를 저질렀다고 하나부터 열까지 친절하게 설명하는 거예요!
[미래] ㅋㅋㅋ
[성란] <시크릿>도 그렇게 이야기를 마무리하잖아요. 근데 전 그 친절한 설명을 듣고도 이해가 다 안 갔어요. 영화가 앞에서 군데군데 범인의 정체에 대해 충분히 암시했다면 한마디 설명만 들어도 한 순간 모든 의문점이 스르르 풀릴 텐데 범인이 자기 입으로 나 범인이네, 하는데도 영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미래] 나름 꼬이고 꼬인 이야기로 범죄 스릴러의 장르적 쾌감을 잘 살려냈다는 자부심을 쿨하게 표현하려 애쓴 듯한 인상이 들던데요. 옳지, 그래, 나 잘했지? 이렇게 자랑하는 것처럼.
[성란] 뭔가 억지로 꿰맞춘 것 같은 느낌이랄까?
[미래] 결국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가고 남는 건, 핑크 바이올렛과 전직 모델 차승원의 수트와 재칼의 엄한 뱀 가죽 무늬 재킷 뿐..
[성란] 네. 지연의 핑크 바이올렛 립스틱은 거의 세뇌 수준이었어요.
[미래] 잊혀지지 않아..
[성란] “이 겨울, 핑크 바이올렛 립스틱을 바르지 않으면 넌 당당해질 수 없어!” 그러는 것 같고. ㅋㅋㅋ
[미래] ㅍㅎㅎ 바로 그런 점에서 <백야행>이 떠올랐던 거구요.
[성란] <백야행>은 이러잖아요. "손예진처럼 허리가 딱 붙는 옷을 입지 않으면 어떤 남자도 유혹할 수 없어!"
[미래] 한 올도 삐쳐 나오지 않게 빗질한 머리카락도 필수죠. 엘라스틴 광고를 보는 줄 알았음..
[성란] 백 번 양보해서 미호(손예진)는 패션 디자이너고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이니까 그렇다 쳐요. 근데 <백야행>에 나오는 모든 여자가 마치 개인 스타일리스트를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일 만큼 완벽하게 단장하고 나오는 건 어떻게 이해해야 하죠? 특히 등 뒤에 붙어서 절대 흐트러지지 않는, 삼단 같은 생머리를 가진 어린 미호의 스타일! ‘청순함’에 대한 집착이 너무 지나쳐서 구태의연하게 느껴질 정도였어요. 아무리 남다르게 성숙한 아이라고 해도 그렇지 어느 초등학생이 평상 앞에서 그렇게 가만히 무릎을 꿇고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책을 읽나요? 그것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오랜 시간이 흐르도록 자세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역시나 삼단 같은 생머리는 어깨 뒤로 얌전히 넘긴 채. 전 이 영화의 소녀들이 통과의례라도 거치듯 흰색 면 원피스 입고 나오는 것도 거슬렸어요. 긴 생머리, 단아한 스타일, 흰 원피스. 청순한 여자에 대한 집착이 너무 지나쳐요.
[미래] 전 원작은 보지 못했는데, 세권이나 되는 원작을 2시간으로 축약하면서 영화는 '스타일 스릴러'로 방향을 정한 거 같더군요. 캐릭터를 스타일만로 설명한 듯하다고 할까요.
[성란] 솔직히 처음부터 끝까지 옷 때문에 인물이 안 보여요. 딱 봐도 미호는 흰색, 요한은 검정이잖아요.
[미래] 인물의 내면엔 1mm도 다가가지 않고 오직 외양으로만 묘사한 듯한 느낌.
[성란] 그러니까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미호는 흰색, 요한(고수)은 검정. 다른 색, 느낌, 생각이 비집고 들어갈 틈을 주지 않죠.
[미래] 휴대폰 컬러까지 블랙 앤 화이트로 맞춰주는 센스! 미호의 부하 직원이 미호를 바라보며 "아! 태양 아래 서 있는 같으세요! 눈이 부셔요~"하고 오라그라드는 대사를 아무렇지 않게 날리는 건 또 어떻구요.
[성란] 나중에는 인물을 위한 스타일인지, 스타일을 위한 인물인지 헷갈릴 지경에 이르러요. 그게 바로 '오그라듦'의 정수죠. 아무리 미호가 옷 잘 입는 패션 디자이너라고 해도 그렇지, 디자이너들이 자기 패션쇼에 서는 모델들보다 화려하게 차려 입진 않잖아요. 대개 디자이너들은 수수하면서도 세련된 스타일을 선호하는데.
[미래] 미호, 패션 디자이너라기보다는 그냥 배우 손예진으로 보이던데요;; 막 승천하려는 천사처럼 차려 입은 그 자태가 정말 눈이 부셔서 똑바로 볼 수 없게 만들더군요. >.<
[성란] 이 영화에서 미호는 척 봐도, 아침에 머리 하는 데만 2시간, 옷 입는 데만 1시간 걸리는 여자의 모습을 하고 나와요. 속옷 라인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착 달라붙는 옷을 입고 있는 미호의 모습을 보면 저 여자는 과연 숨을 쉬기는 하는 걸까, 움직이기는 할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미래] 마네킹 같죠. 뭔가 신비함을 표현하려고 한 건 알겠는데, 미호가 아니라 그냥 손예진으로 보일 뿐. 저는 그냥 '저 몸에 딱 붙는 하늘색 터틀넥 민소매 니트는 과연 어디서 산 걸까'가 궁금해지던데요.
[성란] 동수(한석규)가 미호의 가게를 찾아가는 장면에서 미호가 입은 옷 말하는 거죠? 정말이지 카메라 앞이 아니면 누가 저런 옷을 입고 일을 할까, 싶었어요. 그 장면에서는 미호도 동수도, 심지어는 손예진도 한석규도, 궁극적으로는 영화가 안 보여요. 그냥 하늘색 터틀넥 민소매 니트만 보여요.-_-; 잔머리 한 올 일어날 때마다 거울 보고 빗질하고 속옷, 의상, 메이크업, 액세서리까지 완벽하게 꾸미고 다니는 저 여자가 과연 슬픔과 분노를 가슴에 안고 하루하루를 시퍼렇게 살아가는 사람일까, 자꾸 그런 의문이 들더라고요. 미호의 스타일만큼이나 손예진의 연기도 너무 관습적인 것 같아요.
[미래] 감정이 느껴지지 않아요.
[성란] 학교 화장실에서 흐느껴 우는 장면 빼고는 전부 그랬어요. 그래서 미호가 겉으로는 끔찍한 짓을 저지르지만 속으로는 깊은 상처 때문에 뒤틀리고 눈물 흘리는 여린 여자다, 라는 점이 가슴에 와 닿지 않았어요. 그냥 저 옷을, 저 액세서리를, 저 스타일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그 어떤 나쁜 일이라도 마다하지 않을 것 같은, 악독한 여자처럼 보였어요.
[미래] 외모는 그렇게 스타일리쉬하게 하고선 연기는 왜 그렇게 스타일이 없는 걸까요.
[성란] <백야행>도 <시크릿>과 마찬가지로 영화 자체가 현실감과 장식성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해요. 스타일이라는 게 진짜 세련된 경지로 갈수록,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지만 결코 애써 꾸미지 않은 듯 자연스러운 느낌을 자아내는 법이잖아요. 근데 미호의 스타일도 손예진의 연기도 너무 힘을 준 인상이 강해요. 그건 손예진의 책임일까요, 그런 스타일과 연기를 주문한 감독의 책임일까요?
[미래] 어렵네요.
[성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같은 문제겠죠?^-^;
[미래] 아님, 둘 다 그냥 이 정도만 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을 수도..
[성란] 오호!
[미래] ㅎㅎ
[성란] 오히려 앞에 나서지 않는 고수의 연기는 좋지 않아요?
[미래] 손예진에 비하면 좋았죠.
[성란] 네. 손예진이 너무 과시하려 하는 반면 고수는 드러내지 않는 연기를 하잖아요.
[미래] 하지만 어둠에 갇혀서 한 여자를 향한 들끓는 사랑을 간직한 채 잔혹한 범죄를 저지르는 남자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 역시나 한계가 느껴지더군요.
[성란] 그건 영화 자체의 한계 때문인지도 몰라요. 제가 너무 고수 편을 드나요?ㅋ
[미래] 고수 괜찮아요 ㅋㅋ <백야행>에서 빛난 건 고수뿐이에요.
[성란] 네. 미호와 요한의 정사 장면만 봐도 둘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나요. 영화 처음에 나오는 미호의 정사 장면은 카메라가 제한적으로 움직이면서 오로지 미호의 표정만 잡잖아요. 근데 솔직히 전 그 표정이 너무 싫었어요.
[미래] 아 ㅎㅎ
[성란] 관객으로서가 아니라 여자로서 싫었어요. 딱 봐도, 사랑하지 않는 남자 품에 안겨 있는 여자가 '지을 거라고 생각되는' 처연한 표정을 짓고 있잖아요. 다 포기한 듯한 무표정도 아니고 조금의 짜증이 섞여 있는 것도 아니죠. 진심으로 사랑하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자기가 접근해서 유혹한 남자와 사랑을 나누는데 슬퍼 죽겠다는 표정을, 그것도 아주 청순하게 짓고 있어요.
[미래] 여성으로서 커다란 상처를 지니고 있고, 그 정사를 통해 대단한 무언가를 계획하고 있는 여자인데, 그런 복잡한 심리가 표현되지 않은 것 같아요.
[성란] 결국 사랑을 이용하는 악녀일지언정 사랑을 나누는 순간만큼은 청순하기를 바라는 남성 중심적인 시선이 그 장면에 깊숙이 박혀 있는 것 같아 찜찜했어요.
[미래] 그렇네요.
[성란] 살인이니 성폭행이니 별의 별 짓은 눈 깜짝 않고 다 하면서 다른 남자와 정사를 할 때만큼은 눈물 짓는 여자라니요.
[미래] 허헐.. 그 장면조차 참으로 스타일 있게 찍었군요...
[성란] 한국영화는 유독 여자의 상처를 성(性)과 모성으로 풀어내는 경향이 있어요. 그건 <시크릿>과 <백야행>만 봐도 알 수 있죠.
[미래] 가장 쉽게 생각해낼 수 있는 두 가지죠..;;
[성란] 물론 성과 모성은 여자의 삶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요소에요. 그렇다고 해서 그 두 가지가 여자의 전부는 아니에요. 성을 빼앗겼다고 해서, 아이를 잃어버렸다고 해서 모든 여자가 삶의 모든 걸 걸고 그에 대한 복수를 계획하는 괴물이 되는 건 아니에요.
[미래] 그 범위에서 쉽게 벗어나기가 힘든 거 같아요. 그 이상을 생각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있는 걸 수도 있구요.
[성란] 맞아요. 그 점이 <백야행> 첫 장면, 정사 중인 미호의 표정에서 다시 한 번 보였다고 하면 너무 큰 비약일까요?
[미래] 스타일에 대한 집착을 조금 버린다면 가능할 수도 있겠네요. <백야행> 미호도 그렇고, <시크릿>의 아내를 봐도 그렇구요. 인물들이 스릴러라는 장르와 과한 장식성에 묻혀서 존재감과 매력을 획득하지 못하고 있어요. 단지 불쌍하고 보호해줘야 하는 가련한 여자로만 기능하는.
[성란] 네. 전부 처연한 여자들이죠.-_-; 마찬가지로 두 영화는 남성 판타지를 극대화했다는 점도 비슷해요. <백야행>이야 원작이 있으니까 그렇다 치지만 <시크릿>의 성열은 남자들이 꿈꾸는 강한 남자에 대한 환상을 끝까지 밀어붙여요. 자신에게 전혀 마음을 보여주지 않는 여자를 마지막까지 지키려 들잖아요. 거기서 자신이 존재하는 의미를 깨닫는 남자!
[미래] 치명적인 잘못을 뻔뻔하게 감추고는 아내 지키는 강한 남편으로 동분서주 하는.
[성란] 결정적인 건 그럼으로써 결국 용서받는다는 거예요.
[미래] <시크릿>의 결말은 정말 최고더군요. 세상 다 산 사람처럼 굴다가 환하게 돌변하는 아내를 좀 보세요.
[성란] <시크릿>에서 지연은 겉으로는 아이를 죽게 만든 성열에게 얼음같이 화가 나 있는데 나중에 밝혀지는 걸 보면 사실 별다른 계기 없이 너무 싱겁게 성열을 용서해요. 남자가 아무리 큰 잘못을 해도 목숨 걸고 여자만 지키면 다시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건가요? ‘목숨 같은’ 아이를 잃은 여자의 용서가 왜 이리 쉽죠?
[미래] 이거 생각할 수록 열 받네요;;
[성란] 그렇게 뻣뻣하게 답답하게 처량하게 굴어놓고 결국 어이 없이 눈물을 흘리며 성열의 손을 잡아요.
[미래] 이건 아니잖아요.
[성란] 분명히 말하는데 적어도 저는 그런 여자 아닙니다!
[미래] ㅋㅋ 전 이런 캐릭터를 연기한 송윤아가 다 불쌍해 보이더군요.. 부속품 같이 보였어요.
[성란] 영화의 비밀을 쥐고 있는 인물인데 정작 열쇠가 되질 못해요. 중간에 지연과 성열이 각자 혼자서 아이의 모습을 담은 영상을 보면서 눈물 짓는 장면은 너무 구태의연해서 견디기가 힘들 정도였어요.
[미래] 그 장면 도대체 왜 넣은 거죠?;;
[성란] 인물의 슬픔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그런 장면을 좀 더 치밀하게 그렸다면 지연과 성열의 마음이 좀 더 가까이 느껴졌을 텐데. 너무 관습적인 방법으로 대충 보여주고 넘어가니까 수박 겉핥기처럼 느껴져요. 생뚱한 느낌까지 들고요.
[미래] 헛웃음이 나오더군요.
[성란] 그래도 그 장면에서 훌쩍이는 관객도 있던데 역시 그런 관습이 관객을 쉽게 울리는 걸까요?
[미래] 아..
[성란] 우리가 너무 건조한 건가? 아니면 그 관객이 아량이 넓은 건가?
[미래] 나 너그러운 관객인데..
[성란] 맞다, 나는 몰라도 선배는 너그러우니까 이건 그 분이 아량이 넓다는데 한 표. ㅋㅋㅋ
[미래] ㅋㅋ 암튼 <시크릿> <백야행>을 계기로 웰메이드 스릴러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네요. 더 이상 스타일에 잠식된 스릴러는 사양하겠습니다.
[성란] 네. 웰메이드의 정신이 무엇인지 다시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할 때인 것 같아요. 한국영화가 어렵다 어렵다 하는 요즘인 만큼 기존 웰메이드의 유산을 그대로 따라할 게 아니라 그걸 어떻게 새롭게 발전시키고 개발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것 같아요. 그래야 또 새로운 부흥을 만들어 갈 수 있어요.
[미래] 정말 딴 생각 하게 만들지 않는, 스릴 넘치는 스릴러를 만나보고 싶네요.
[성란] 그리고 또 한 번 느끼는 거지만, 스릴러라는 게 참 만만한 장르가 아니에요.
[미래] 번뜩이는 아이디어 하나만 가지고는 정말 힘든 일이에요.
[성란] 이제는 그저 '그럴 듯 하게 만드는' 정도 가지고는 성에 안 차요. 2010년에는 진짜 웰메이드 스릴러, 또는 정말 새로운 스릴러를 만나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미래] 기대해 보죠.
[성란] 전 정월 대보름날 달을 향해 새해 소원으로 빌 거예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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