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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비> - 우리의 영웅이 죽음을 맞이할 때

ESSAY ON 2010/01/31 22:47 Posted by 파란다이스

영웅의 역사는 아주 오래전에 끝난 줄 알았다. 하지만 아무리 시대가 변한다 할지라도 민중의 마음을 움직이고 그들의 꿈을 짊어진 이는 언제고 등장하기 마련인가보다. 칼을 휘두르고 총포를 쏘던 정복의 영웅은 가고 꿈이 없는 이 사회에 언젠가부터 총구를 내려놓은 ‘꿈의 영웅’ 시대가 도래했다. 사람들은 그를 통해 꿈을 꾸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길 기대했다. 허나 야속하게도 이 영웅들은 모두가 꿈꾸던 이상향만을 덩그러니 남겨둔 채 훌쩍 사라지곤 했으니. 그들이 남기고 간 깊은 생채기는 어느 한 개인의 죽음으로 단정 지을 수 없는 허망함으로 가득하다.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고 그저 희끄무레한 신기루처럼 일렁이던 누구나의 꿈과 이상은 어느새 그를 통해서 명확한 그림을 다잡는 듯도 했으니까. <바비>는 바로 이러한 시대의 열망, 그리고 하루아침에 사그라진 희망에 관한 이야기다.


암살로 생을 마감한 존 F. 케네디의 친동생인 로버트 F. 케네디는 JFK 사후에도 그의 유지를 잇는 이념 하에 정치활동을 계속하며 미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영화 <바비>는 ‘바비’라는 애칭으로 불리던 로버트 케네디 의원의 암살당일을 다루는 작품이다. 그럼에도 주인공은 바비가 아니다. 민주당의 유력한 대통령 후보로서 1968년 6월 5일 캘리포니아주 당내 경선에서 승리를 거둔 직후 LA 앰버서더 호텔에서의 연설을 위해 방문해 호텔 주방에서 암살당하는 케네디 의원의 비극은 철저히 시대배경에 머문다. 대신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할리우드의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총출동한 이 작품은 이들 스타군단 모두를 주인공으로 다룬다. 케네디 의원의 캘리포니아 대선 예비선거사무소가 차려진 앰버서더 호텔을 무대로 바비의 참모진과 선거원, 호텔 지배인과 요리사, 주방보조, 호텔전속 스타일리스트, 은퇴한 도어맨, 거기에 호텔에서 막 결혼식을 올린 젊은 부부, 한물간 가수와 그의 남편 등 이 모든 이들이 영화 <바비>의 중심을 아우른다.

익숙한 얼굴들이 각기각색 캐릭터에 안착한 성과는 우선 탁월하다. 영화가 바비가 아닌 바비의 주변을 통해 당시의 시대상을 대변하며 자연스럽게 RFK를 위시한 시대의 새로운 열망을 드러내고자 했던 시도는 이들에 의해 완벽하게 달성된다. 이들 캐릭터 중에는 바비를 통해 자신의 꿈을 투사하는 그의 측근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와는 전혀 무관한 일개 개인에 가깝다. 하지만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개개인의 조각 하나하나를 모아 완성시킨 이 거대한 모자이크화는 부러 거짓으로 쌓아올린 시대상이나 영웅에 대한 환상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비극적 죽음에 담긴 모든 이의 좌절과 애석함을 중층의 의미로 포괄한다. 그들 중에는 이미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암살로 절망에 빠진 흑인도 있고, 그저 미국에 대한 불만에 가득 찬 콤플렉스 덩어리 이주 노동자도 있다. 또 정치와 자신은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듯 대마초와 LSD로 현실도피에 매진하는 젊은이들도 있고, 애틋한 사랑을 나누는 중년부부와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식을 올린 예비부부 등 대부분 오로지 눈앞에 놓인 자신들의 장밋빛 미래만을 위해 애쓰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미국인들의 사라진 영웅 바비야말로 오히려 영화의 주변인과 다름없다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영화는 단순히 바비의 암살 당시 그 곁에 있었다는 이유로 이들 갑남을녀들을 담았던 건 아니다. 정치에 대한 그들의 열망이 크던 적건 이들 모두는 당시 바비를 통해 일렁이던 시대의 변화를 목도했던 사람들이다. 그래서 한물간 알코올중독 여가수도, 또 남편의 외도를 눈치 챈 어느 아내의 오래토록 축적된 희망과 절망의 조각들도 모두 바비의 승리와 바비의 죽음으로 합일된다. 마치 작년 우리가 떠나간 그들을 그리워하며 애석해 했던 그 모습처럼 말이다.

<바비>에는 故김대중 전 대통령과 故노무현 전 대통령을 떠나보내야 했던 작년 우리의 그림자가 한껏 서려있는 듯하다. 역사 속에서 참으로 무상하게 사라진 지도자와 그를 잃은 아픔은 단지 국가의 아픔이거나 어느 타인의 아픔만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잃고 나서야 비로소 깨닫고 슬퍼했던, 그리고 정치와는 무관하다 생각하고 사는 대개의 사람들에게조차 크던 작건 간에 끼쳤던 무언가는 이를 증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반복되지 말아야 할 비극이 또 다시 반복되는 사이 그것을 겪고 느꼈던 우리들 하나하나는 바로 불행한 역사의 실재하는 조각들이다. 링컨이나 JFK나 RFK 혹은 노무현 같은 지도자에 대한 이야기는 바로 이들 각자의 조각들을 통해 비로소 영웅이란 단어에 서린 참의미를 갖는다. <바비>는 바로 불행한 역사에 대한 가장 진실한 초상이자 새로운 시대를 꿈꿨던 우리들의 또 다른 거울이다. 강상준 기자(FIL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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